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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 Jesus )
    Basic_Study/Religion 2021. 4. 22.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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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히브리어: ישוע, 아랍어: يسوع/عيسى, 기원전 1세기 말 ~ 기원후 30년 / 33년 추정),
    모자이크 (「 거룩한 무덤 성당 」,  예루살렘 )

    나사렛 예수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종교인 기독교에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신앙의 대상이자 인류의 4대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혁명가, 사상가라는 주장도 있다.
    기독교는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예수를 "야훼의 아들이자, 또한 하나님이시며,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라고 믿으며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한 왕과
    자신을 대등하게 인식하는 것으로서
    시대를 초월한 혁명적인 발상"이라는 것을 근거로
    혁명가나 해방자로 보아 해방 신학이 태동하기도 했으며
    이런 사상과 유사한 입장인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비판적인 기독교인과 다른 면모를 보인
    예수의 역사적 실존에 대해 학계에서 긍정하기도 하지만,
    복음서의 역사적 신뢰성과 성경에 묘사된 예수가
    역사적 예수를 적절히 반영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선 비유적 표현이라는 것에 일치된 견해를 보인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이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약성경을 구성하는 수록 문서에 등장하는 예수는
    갈릴리에서 태어난 목수의 아들인 유대인으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자신만의 공생애를 시작했다.
    예수는 구전 복음을 전했으며 "랍비"라고 자주 불렸다.
    예수는 신을 청종하는 방법에 대해 유대인들과 토론했고 비화를 가르치면서
    기존 율법주의자들과 대립하면서 지지자들을 모았다.
    이에 위기를 느낀 자들의 고발에 의해
    예수는 산헤드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고
    로마 정부에 인도되어 유대인 군중이 거세게 압박하는 가운데
    유대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명령으로 십자가형을 당했다.
    예수의 죽음 이후 예수의 지지자들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다고 믿었고
    지지자들이 형성한 공동체는 초기 기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예수는 성자이자 처녀였던 마리아의 아들이고,
    기적을 행하는 동시에 교회를 창립해 인간을 구원하며,
    인간을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형을 받아 죽었다가 부활해서
    천국으로 간 뒤 언젠가 재림할 것"을 교리로 삼으며
    니케아 신경은 "예수가 살아있을 때나 죽은 이후에도 삶과 죽음을 판단한다"고 단언하고 있다.
    기독교는 예수를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온 신이자
    신의 아들인 존재로 숭배하며 삼위일체 중 제2위인 성자로 보고 있다.
    예수가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로마가 지정한 12월 25일을
    기독교 문화권을 중심으로 성탄절로 기념하고 있으며,
    예수의 희생은 성금요일로, 예수의 부활은 부활절로 기린다.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표준으로 사용하는 연호인 서력기원은
    예수가 태어난 해로 추정되는 시점을 기원으로 하며,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은 기원 전(BC)이라고 한다.
    단기를 연호로 사용하던 대한민국은
    1962년 1월 1일부터 서력기원으로 단일하여 사용하고 있다.
    예수는 기독교 이외에 같은 아브라함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교 속 예수는 '이사 이븐 마리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신의 중요한 예언자이자 메시아"로 여기지만
    예수가 처녀로부터 태어났다는 것만 인정할 뿐
    '쿠란에서 예수가 신성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음'을 근거로
    신이나 신의 아들로 여기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것을 믿지 않지만,
    예수의 육체가 신에 의해 천국으로 올라갔다"고 믿는다.
    대조적으로 유대교에서는
    예수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믿음을 거부하며,
    메시아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고, 신성함이나 부활 또한 믿지 않는다.


    어원

    헬라어 이름인 예수스
    히브리어 여호수아(히브리어: יהושוע, Jehoshua)의 축약형인
    예슈아(히브리어: יושוע, Jeshua)를 코이네 그리스어로 옮긴 말이다.
    여호수아(Jehoshua)의 어원은 접두어 (Je-)
    (히브리어: יהוה, JHVH/YHWH:Jahveh 야훼, 하나님)와
    호세아(히브리어: הושע, hoshea, 구원, 구세를 의미)를 덧붙여 이루어진 이름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 예수를 가리킬 때에는 흔히
    예수 그리스도가 자란 고장의 이름을 덧붙여서
    "나사렛(Nazareth) 예수"로 부른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부모의 이름을 앞에 붙여 부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요셉의 아들 예수"(누가 복음서 2:21),
    나사렛의 예수(요한 복음서 1:45) 또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마가 복음서 6:3, 마태 복음서 13:55)
    중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름에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가므로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아들 예수'(ישוע בן יוסף | 예수아 벤 요세프)은 정식 성명이다.
    쿠란에 기록된 예수의 아랍어식 이름은 '이사 빈 요세프'이다.

    맨위 시계반대방향으로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라틴어, 그리고 영어 이름


    예수에게 따라 붙는 그리스도라는 낱말은
    "기름을 부은" 이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크리스토스는 흔히 '메시아'로 표기하는
    "히브리어: מָשִׁיהַ 마쉬아흐"를 번역한 것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은
    유대인의 종교적 예법에 따르면 드높은 사람,
    다시 말해 왕이나 예언자, 사제, 메시아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메시아 예수라고 풀 수 있다.
    성경과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 뒤로 예수는 많은 성도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이적을 보이며,
    로마 제국의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한 뒤 사흘 만에 부활한다.

    출생 시기와 장소

    '기원후' 의미로 사용하는 'A.D.(Anno Domini)'는
    예수 출생 이후 시대를 의미한다.
    'B.C.'와 'A.D.' 구분은
    6세기경 신학자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부활절 날짜를 계산하면서 사용한 게
    이후 그레고리력 율리우스력에 반영되었다.
    이때 계산한 예수 그리스도 탄생 연대 기준이 오늘날까지 쓰인다.
    하지만, 현재 예수가 태어난 해는 AD 1년이 아니라는 것이 전반적인 입장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팔레스틴 북부인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나자렛)'이라는 시골 출신이었으므로
    그 출생에 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드물다.
    오늘날 복음서 기록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일과 태어난 장소를 미루어 짐작하고 있으며,
    대체로 역사적 예수는 기원전 약 2년~4년 경 태어났다고 추정한다.

    마태 복음서(2장 1~16절)에는
    예수가 태어난 해에 하늘에 '동방의 별'이 나타나고
    헤로데 왕이 2세 미만의 갓난 사내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을 내려
    그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하는 내용이,
    누가 복음서(2장 1~2절)에는 아우구스투스가 호적을 명하여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을 찾는 내용이 실려있다.

    누가복음에 언급된 인구조사는
    기원전 4년 경에 이루어졌다는 견해와
    기원후 6년에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예수의 탄생 시점에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으며
    당시 시리아 지방의 총독이 퀴리니우스(퀴리뇨, Quirinius)였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누가 복음서 2장 1~7절)
    퀴리니우스는 1764년에 로마에서 발견된 비문에
    기원전의 퀴리니우스 총독을 언급한 것을 근거로 볼 때
    기원전 4년경 총독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견해가 있다.
    따라서 예수는 기원전 2년 ~4년 경에 출생한 것으로 대체적으로 받아들여 진다.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 마리아에게 예수를 낳을 것임을 알리는 장면,  성모영보 를 그린 그림
    이집트 피난 장면

    '동방의 별'은 이후 '베들레헴의 별'로 알려졌다.
    17세기 독일 천문학 요하네스 케플러
    이를 800년 주기로
    목성 토성이 분점에 대해 같은 위치에 놓이는 현상과 연관된 것으로 주장하였고,
    이로부터 그 시기를 기원전 7년으로 추측하였다.

    한편, 예수의 탄생설화를 상징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마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탄생설화에 나오는
    유아학살과 이집트 피난전승은
    유대 기독교인인 마태와 마태교회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에게 익숙한 인물인
    모세와 같은 권위를 가진 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썼다고 보는
    성서학자도 극소수 존재한다.(모세유형론)

    ■ 태어난 곳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지는
    누가 복음서 마태 복음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베들레헴이지만,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성장하였다.
    마르코 복음서 요한 복음서에 언급된 바와 같이
    당시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로 불리었던 이유는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 있을 때 임신했으며,
    베들레헴에서 출생후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하고 생활했기 때문이다.

    구유에서의 출생 이야기는 오로지 누가 복음서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예수가 태어나게 된 이유를
    누가는 인구조사 때문에
    예수의 가족이 고향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마을을 떠나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방인
    유다의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 까닭은 나사렛의 요셉과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다윗 왕의 후손이기 때문에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호구 등록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마태는 메시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자 미가서(5:2)와 이사야서(7:14)의 예언대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며,
    이후 예수의 가족은 헤로데스 1세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가서 살다가 흔히 헤로데 대왕이라고 부르는
    헤로데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으로 돌아와
    그 곳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누가는 어떻게 베들레헴에 가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고,
    마태는 그것이 바로 예언의 성취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추가 설명을 한 것이므로 모두 일치된 기록이라는 해석이 보편적이다.

    신약성경 시대의 팔레스타인 지방
    -해석
    1. 위 두 기록들은 언뜻 읽기에 서로 모순이 없는 것 같지만, 복음사가들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는 의견 역시 존재한다. 자세히 분석해 보면 다음 내용과 같다.
      • 예수를 다윗 왕의 후손으로 소개하려는 복음서를 쓴 사람들의 편집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 이에 따라 갈릴래아에서 지리상 완전 동떨어진 유대로 예수의 가족이 이사를 한 것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 예수의 첫 활동 무대가 나사렛이었던 관계로 그의 고향을 다시 나사렛으로 삼은 것으로 추측된다.
    2. 마르코 복음서 1:9에, '예수께서 갈릴리의 나사렛에서'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예수의 출생지가 나사렛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요한 복음서 1:45에,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이 출생지라고 근거할 수 있는 논거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복음서 내의 전반적인 문맥을 따라서, '출신지'로 보며, 천주교, 개신교에서는 예수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나, 나사렛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나사렛을 출신지역으로 보고, '나사렛 예수'으로 불린 것으로 보고 있다.
    복음서에서의 예수
    ■가계

    예수 가계에 관한 기록은 마태 복음서 누가 복음서에 남아 있다.
    두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나사렛의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

    1850년 그림, 예수와 그분의 가족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세례자 요한, 엘리사벳, 예수, 성모마리아의 모습

    가계도로 보면,
    예수의 아버지인 나사렛의 요셉은 목수였으며,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라 부르는 나사렛의 마리아였다.
    누가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을 낳은 엘리사벳과 친족 관계였다(누가 복음서 1,36).
    예수의 잉태 및 탄생과 관련된 성서 기록을 보면,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기 전에
    대천사 가브리엘에게 아이를 낳을 것을 고지받았다(누가 복음서 1,26-38)
    그후 마리아는 약혼자 요셉에게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가 잉태된 사실을 고백하였다.
    요셉은 신앙심 깊은 인물이었으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요셉은 꿈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게 되고,
    마리아와 결혼하게 된다.
    그 후 마리아는 예수를 출산하였다.(마태 복음서 1,18-25)

    마태 복음서 누가 복음서는 예수의 육신적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요셉은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 복음서(1,2-17)은 요셉의 선조를
    아브라함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반면,
    누가 복음서(3,23-38)은 심지어 아담까지 족보를 까마득히 펼치고 있다.
    두 복음서는 여기서 약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마태는 다윗에서 요셉까지 28대를 손꼽고 있는 반면,
    누가는 요셉이 다윗의 42대 자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역대기 상 3:10-24를 참조하라).
    신학자들에 의하면, 두 족보가 다른 이유는
    마태와 누가의 복음사가가
    각각 요셉과 마리아의 가계도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고대교회의 신학을 형성한 교부들도
    마리아가 다윗의 후손이라 말하였고, 교회의 전승 또한 이와 일치한다.

    ■ 가족

    예수에게 성모 마리아 요셉 이외에
    다른 가족이 어떤 형태로 있었는지에 대해서 신학적 차이가 존재한다.

    현대의 개신교 신약성서학에서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의 형제들을 예수의 탄생 이후에
    마리아와 요셉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예수의 친동생들이라 해석한다.
    그 근거는 누가 복음서 (2장7절)에 있는
    "그녀의 맏아들"이라는 기록이나
    마태 복음서 (1장25절)에 "그녀가 맏아들을 낳을 때까지 요셉이 그녀를 알지 아니하였다"는 기록,
    마태 복음서 13장 55절 56절에서 예수 형제들의 이름과 예수의 누이들의 존재가 거론된다.
    그리고 농사 짓는 시기에 예수의 사촌 형제들이 밭에 나가지 않고,
    마리아를 데리고 예수를 만나러 이동하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베드로를 인정하지 않는 요한복음서의 예수가
    십자가에서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는 장면은
    요한복음을 집필한 공동체에서
    제자 요한이 예수의 가르침을 잇는 가장 중요한 사도임을 알리는 장면이다.

    반면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믿는 동방 정교회 천주교회, 오리엔트 정교회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형제들을 친척형제 또는 사촌형제들이라 해석한다.
    왜냐하면 오늘날까지도 중동지역에서 형제라 함은
    사촌형제를 아우르는 말로 쓰이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가 그의 홀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맡기는 장면
    (요한 복음서 19장 25-27절)을 떠올려 봐도
    예수의 형제들을 ‘친형제들’로 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독교 초기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었던
    ‘주님의 형제’ 야고보나 요셉, 시몬, 유다 (갈라디아서 1장 19절, 마태 복음서 13장 55절)가
    예수의 친동생들이었다면
    (즉,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예수 이외의 친자녀가 더 있었다면)
    요한복음서에서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가 친족들 앞에서
    그의 육신상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길 까닭이 없다.
    예수의 어머니에게 예수 외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가 사랑한 제자에게 홀로 남겨질 어머니를 부탁한 것이란 해석은 자연스럽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복음사가
    누가의 신학적인 의도가 들어 있는 누가 복음서의 몇 구절이 조금이나마
    예수의 어린 시절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예수의 12세 때 유대인들의 광복절인 과월절을 지키려고
    부모와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배를 마치고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물렀지만
    부모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룻길을 갔다가,
    방황하면서 아이를 찾았다고 한다.
    예수를 찾은 지 사흘 뒤에 다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만났을 때,
    예수는 유대교 랍비, 곧 율법교사들과 율법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가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고 했다.
    이에 부모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묻자,
    예수는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 자신과 온 인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 때의 예수가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 준다(누가 복음서 2,41-51)

    그 뒤에, 계속해서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는
    요셉의 직업을 이어 목수 일을 배우며 자랐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엔도 슈사쿠 복음서에서 말하는 목수는
    떠돌아다니면서 일하는 노동자였을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예수가 자신의 고향 갈릴리 나사렛에서의 회당예배때에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자신이 고난받는 민중들과 연대하는 메시아로서 살아갈 것임을 알리는 설교를 하자,
    고향사람들이 지혜에는 감탄했지만
    '저 사람은 (목수인)요셉의 아들 아닌가.'라며
    예수가 변변치 않은 직업을 가진 사람임을 지적하였다는
    누가 복음서의 보도(누가 복음서 4:16-22)는
    목수라는 직업이 변변치 않은 직업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예수의 유년시절에 대해
    누가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고
    (누가 복음서 2:52) 간단하게 적고 있다.

     세례자 요한
    예수는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나사렛을 떠나 출가하였다.
    그 이후에 당시 먼저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먼저 광야로 나가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에게로 나아갔다.
    예수를 본 세례자 요한은
    오히려 자신이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받으러 오셨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통하여 '모든 의를 이루기를' 바라셨고, 마침내 세례를 받았다.
    물속에서 세례를 받은 뒤에
    물에서 올라오자마자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셨고,
    하늘에서 한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은 것은
    모든 인류는 세례를 받아야만 이 구원에 이르게 됨을 몸소 보여준 실천사례이다.
    이러한 예수의 세례 장면에 대한 성서의 언급을,
    선지자 요한을 추종하는 종교와
    기독교 사이의 투쟁에서의 우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수의 신학자들도 있다.
    교회력을 신앙 전통으로 지키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공적인 생애를 시작한 날을 '주님의 세례주일'로 기념한다.

    예수를 세례하는 요한



    ■ 고행과 유혹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에,
    홀로 광야로 들어가, 40일 동안 금식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에, 높은 곳에 올라가 마귀에게서 세 가지의 유혹을 받았다고 한다.

    • 첫 번째 시험: 들을 으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예수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신명기 8:3)'라는 성경 말씀으로 대적하였다.
    • 두 번째 시험: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게 유혹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이번에는 특이하게 성경 구절(하나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시편 91:11,12)을 들어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떠보지 말라'(신명기 6:16)는 말로 사탄의 유혹을 꺾었다.
    • 세 번째 시험: 천하 만국을 보여주며,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들을 네게 주겠다고 한 것이었는데, 예수는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기 6:13)라는 성경 구절을 들며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고 난 뒤, 사탄은 그를 떠났고, 천사들이 날아와 그를 도왔다고 하였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신약성경 학자들은 예수께서 받으신 유혹을
    고난의 그리스도가 아닌
    영광의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유혹 내용들이 모두 명예욕을 채울 수 있는 조건들이었기 때문에,
    모두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라는 유혹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율법학자들과의 논쟁
    복음사가 누가에 의하면
    예수는 이미 12살 적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리스도는 율법학자와 토론을 벌였는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전승도 율법학자와의 토론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느 율법학자가 그리스도에게
    "진짜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예시를 들어,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를 보고도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간호하고 여관에 맡겨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달라고 부탁하여 보살폈다는 비유를 말한다.
    그러면서 누가 참된 이웃이냐고 묻자,
    율법학자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예루살렘 입성과 마지막 만찬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는 민중들의 환대를 받는데,
    이는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생각해서였다.
    실제로 성경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 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 놓기도 하였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나뭇가지는 당시 
    유대교 종교 권력의 횡포로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이 재배하던 
    종려나무의 가지였다.
    하지만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죽음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이들의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떼어
    감사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죽음이 뜻하는 바를 설명하였다.
    이를 그리스도의 성체제정이라고 하는데,
    성공회, 정교회,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체성사, 성찬례, 성체성혈성사,
    개신교에서는 성만찬이라고 부르는 성사
    성직자가 집전하여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을 기념한다.

    〈 최후의 만찬 〉(1495 - 1498,  밀라노 )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자신들에 대해 비판적인 예수를
    위험 인물로 본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은
    가리옷사람 유다와 결탁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예수는 가리옷 사람 유다가
    자신을 유다의 대제사장들에게 팔아넘겼다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한 내막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 때
    자신의 제자들 중 한 명이 자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발언한 것이었다.
    체포된 예수는 유대인들의 자치기구인 산헤드린 의회에서의 재판을 거쳐
    본티오 빌라도의 재판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해서 누가 복음서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여 풀어 주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압력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누가 23:14-25).
    하지만, 빌라도의 총독으로서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예수를 그의 의지에 따라 십자가형에 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실례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그의 십자가에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민족 지도자를 뜻하는
    '유대인의 왕(INRI)'라는 죄패가 달렸으며
    예수를 처형한 세력은 로마 제국의 공권력이었다.
    더구나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환호를 받을 만큼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유명 인사였으므로
    빌라도에게 그는 위험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누가
    교회가 로마 제국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지지했으나
    마지못해 십자가형에 처한 것처럼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는 일부 시각도 있다.
    반면에 빌라도에 대한 마이어의 연구를 보면,
    당시 본디오 빌라도의 보호자 즉 후원자는 세야누스 였는데,
    그는 황제에 대한 반역 음모를 꾸미다가 A.D. 31년 권력에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빌라도의 지위는 A.D. 33년경에는 매우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 시기는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시기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당시의 유대인을 분노케 함으로써
    황제와의 관계가 더 이상 곤경에 빠지지 않길 원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복음서의 묘사가 가장 정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두 명의 강도[60]들과 함께
    잔인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전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며
    구타 조리돌림을 병행하여 당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십자가 모양의 형틀이 아닌 가로대를 가리킨다.
    처형장에 끌려가는 도중 예수가 모진 구타끝에 체력이 다하여 쓰러지자
    구레네(카르타고 - 오늘날의 튀니지)출신의 '시몬'이라는 역사(力士)가
    예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십자가의 모양은 본래 T자 모양이었으나 +모양으로 알려졌다.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진 예수
    1.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기원하셨다.'
    2.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4. '세 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5.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6.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
    7. '예수께서는 큰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죽음 이후
    기독교 경전인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
    십자가에 못박혀 장사되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12제자를 축복하고
    많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으며
    아래는 
    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스도는 사흘만에 죽음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부활하기전의 그의 행적은 배드로전서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후에
    십자가 우편에 있던 자와의 약속한대로 낙원으로 가셨다.
    그런후 낙원에 가지못한 죽은 영혼들이 모여 있는 영옥으로 가서
    영의세계(사후세계)에서 다시 복음을 전파했던 것이다.
    그런 후에 부활을 하신것이다.
    특히 베드로전서 3장 20절을 통해
    영옥에는 노아의 홍수때에 죽은 영혼들이 많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홍수가 나기 전에 선지자 노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그리스도의 방문을 통하여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된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써 불의 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베드로전서 3장 18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베드로전서 3장 19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베드로전서 3장 20절>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베드로 전서 4장 6절>"

    기타 논란
    ■ 외모

    외모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현재 동방교회 서방교회 전통에 따라 외모의 차이가 있다.
    동방교회 지역 성화인 이콘의 예수 모습은 작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정해진 규칙에 따라 그리며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이콘에는 셈족 특성이 남아서
    짙은 피부색에 갈색 머리카락, 눈동자 모양, 옷 색상과 모양 등의 기준이 있다.

    이와 달리 12세기 이후 서방교회는 이콘 제작 전통을 따랐으나
    점차 이콘 화풍에서 벗어나면서
    예수의 얼굴은 서유럽인들 특히 라틴 계열 인종인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인종 모습이 기준이 되었다.
    게르만족이 기독교화하면서
    독일, 영국,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인종 모습의 예수상도 나타났다.

    예수의 실제 초상화가 전해지지 않아 모습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흔히 서유럽 지역의 그림인
    연한 갈색이나 금발을 하고 파란 눈을 그린 예수화는
    원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의 혈통이 고대 이스라엘 다윗 계열이고
    직업이 목수였다는 점에서
    샘족 특성을 지녔을 것으로 짐작한다.
    검은 색에 가까운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
    백인과 흑인 중간의 피부색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 실존 여부

    예수의 실존 여부는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가 실제로 신의 아들이었느냐는 신학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누군가-특히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가
    예수라는 존재를 허구로 만들어 내었다는 주장은 큰 지지를 받지 못해왔다.

    주요서적 : 크라이스트 신화 신학 체계(영어판), 예수의 역사 사실성(영어판), 예수의 연대(영어판)

    참고 서적 : 예수에 대하여 요세푸스(영어판), 예수에 대하여 타키투스(영어판)

    예수가 역사적 인물로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복음서의 특정 일화들과
    그에 서술된 연대,
    그의 신격에 대해 거론된 신학적 이슈들에 관한 토론을 통해서 검증되어야 한다.
    또한 성경뿐만 아니라,
    유대인이나 그리스 로마의 자료 등
    다수의 역사적 비기독교 자료들 또한
    예수의 역사적 실존에 관한 분석에 이용된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의 세례와 그의 십자가형을 역사적 사건으로 본다.
    로버트 반 브루스트(영어판)에 의하면
    비기독교파에 의해 제기되어온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항상 논란이 되어 왔지만,
    많은 학자들을 설득하는 데에 실패하고,
    고전 시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와 성경학자들 또한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논박하고 있다.
    Walter P. weaver와 그의 학자들은
    예수의 존재를 부인하는 활동들이
    기술적인 범주 안에서나
    이외의 어떤 식으로도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혀 설득력이 없었던 것으로 기술한다.

    1세기 로마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와 타키투스(Tacitus)를 포함한
    비기독교인들의 자료들도 예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사용된다.
    요세푸스(Josephus) 학자인 루이스 펠드만(영어판)
    요세푸스의 '역사적 예수의 존재 여부에 관한 언급'에 대해
    "소수만이 그 진정성에 관해 의문을 가져왔다(few have doubted the genuiness)"라고 진술하여
    오직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서만 예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논점이 되었다고 기술했다.
    바트 D. 어만은 예수의 존재와
    그에게 집행된 로마에 의한 십자가형에 관해
    요세푸스와 타키투스를 포함한 다양한 자료에 의해 입증된다고 서술한다.

    예수의 역사적 인물로서의 존재 여부는
    그의 신성과 인성이나
    그의 존재가 사람인지 또는 신인지의 신학적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급진적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
    특별히 예수의 존재 여부를 초자연적인 힘이 그에게서 나오는지,
    또는 기독교 복음이 정확한지는 별개의 문제로 구분하고 있다.
    도킨스는 비록 그의 견해가 복음의 문제에 관해 신뢰하지는 않지만,
    예수의 존재 여부에 대해 부인하지는 않는다.
    또한 비평가인 조지 알버트 웰스(영어판) 역시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 없는 인물이라 주장했지만,
    이후에 그는 견해를 바꾸어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예수의 존재 여부는 전혀 논점이 아니었고
    그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어 온 적은 없었다.
    초창기 기독교인들 사이에
    그리스도 단성설, 그리스도 가현설, 네스토리우스의 교의와 같은
    예수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관점의 차이는 존재해 왔지만,
    그것은 기독교 교리에 관한 논쟁이지 예수의 존재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소수의 현대 학자들이
    예수가 존재한 적 없는 인물이라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 견해는 뚜렷히 비주류이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의 존재를 기독교가 만들어냈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이 글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공개된 위키백과 문서
    ko.wikipedia.org/wiki/%EC%98%88%EC%88%98의 자료를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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